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모델 (문단 편집) === 독소전쟁 초기 === >귀관의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지금 낭비하는 1분 1초가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진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기술적 측면을 서둘러 해결하라. 이미 시간을 많이 잃었다. >---- >발터 모델 중장. 1941년 7월 3일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전차 198대 중 128대가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그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자는 부하 장교의 건의에 대하여 [[파일:attachment/600_Guderian_Model.jpg]] ||1941년 8월 1일, 교량 점거를 보고하는 제3기갑사단장 발터 모델과 이를 치하하는 하인츠 구데리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모델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휘하로 배속되었다. 전차 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으나,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군단을 해체시켜 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Gruppe Model)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독일군의 진격으로 [[스몰렌스크]]에서 310,000명, [[키이우|키예프]]에서는 무려 665,0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했고, 그 무훈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이때 16기갑사단장이 학창 시절 급우였던 한스 후베 소장이었다. 사단장으로서의 모델은 언제나 선봉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소련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교량을 확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하여 진격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선봉 부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 진지에 반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게 우회하여 중요 거점을 우선 점거하며 전술적 우위를 장악했고, 연료 부족과 열악한 도로에 의한 전차의 비전투 손실, 악천후에 후속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자 모델은 정예 부대원들을 선발하여 전투단을 재편성, 이들 선발대를 거듭 진격시키는 전법으로 3기갑사단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 9월 17일에야 처음으로 진군을 멈추고 차량을 수리할 수 있는 휴식이 주어졌다.]하는 압도적인 전과를 달성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독일군 기갑 부대 지휘관 중에서도 모델의 숙련된 부대 운용과 공격적인 지휘는 가장 돋보였고, 이는 작전 개시 4개월 만에 기갑대장으로 진급하고, 연이어 4개월 후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Robert Forczyk, 2014]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3기갑군 산하의 41기갑군단장으로 참전하여 모스크바 20km 앞까지 도달했으나, 강추위 및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델은 최후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며 3기갑군의 후퇴를 엄호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너져 버린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한계 지점의 전선까지 오고 가며 지휘를 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군단장과 동행하여 눈폭풍이 몰아치는 끔찍한 전장을 오고 가야 했던 참모들은 모델을 '''전선의 멧돼지'''(Frontschwein)라 부르며 비난했다.] 가장 선두에 진격해 있었기에 전군 퇴각시 최후미를 맡게 된 모델은 역시 모스크바 13km 앞까지 진격했던 제6기갑사단장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와 처음으로 작전을 함께 했는데, [[동부전선]]의 특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전법을 창안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는 두 장성이 각별한 전우애[* 모델이 라우스를 만나러 오던 중 부대의 이동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대에 위치한 근사한 저택을 발견했다. 프로이센 출신의 저돌적인 군단장은 당장 이곳에 군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통신선을 연결할 것을 명령했으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점잖은 사단장은 침착하게 반대 의견을 말하려 했고, 참다 못한 모델이 고함을 지르자 결국 라우스마저 맞고함을 질렀다. '''"지뢰가 발견되었습니다!!"''' 머쓱해진 모델은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 작은 사건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언쟁일 만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한다. 두 살 연상의 라우스가 모델의 속사포 화법에 적응했다고 한다.]를 이어가며 수많은 전투를 함께 했던 나날의 시작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